
필리버스터는 소수 정당이 무제한 토론을 열어 합법적으로 의사 진행을 방해하는 제도다. 다수당의 일방적인 입법 독주를 견제하고, 소수당의 발언권을 보장하기 위한 헌정 질서의 최후 수단이다. 요컨대 필리버스터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로 평가된다.
그러나 최근 이 같은 뜻은 퇴색하고 있다. 불참, 말싸움에 이어 단순 시간끌기, 회기 쪼개기(살라미)까지 나오며 정치적 편법의 도구로 사용되는 모습에서 진정성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토론과 의회주의의 품격을 상징하는 필리버스터가 본회의장에 의원이 거의 없는 채 소모전으로 이어지는 모습이 포착된다.
앞서 지난해 7월 국민의힘은 필리버스터를 시행했지만 이 과정에서 일부 의원들은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졸아 ‘필로우 버스터’라는 말까지 나왔다. 또 당시 필리버스터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를 위한 명분 쌓기로 평가되며 의미도 퇴색됐다.
과거에는 달랐다. 국내 최초 필리버스터인 1964년 4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필리버스터는 같은 당 김준연 의원의 체포동의안을 막았다. 5시간19분 동안 원고 없이 의사진행발언을 이어갔다. 시간 끌기가 아닌 분명한 본인 주장과 근거를 무기로 내세웠다. 192시간 27분 동안 이어진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에서는 정의화 국회의장이 토론자를 위해 발판을 설치하거나 여당 의원의 토론 항의를 제지하기도 했다.
필리버스터가 정쟁 수단으로 쓰이면 결국 국민 신뢰를 잃게 된다. 정치권의 전략 싸움이 길어지면 국민은 점점 국회를 외면한다. 외면은 정치 혐오를 부른다.
여야는 제도의 틀을 지키는 정치권의 책임감을 보여야 한다. 필리버스터는 민주주의의 상징이다. 품격 잃은 필리버스터로 정치혐오를 키워선 안 된다. 진정성이 깃든 건강한 정치문화는 그런 책임감에서 나온다. 국민의 신뢰를 지키기 위해 정치권은 제도를 정략적으로 소비하지 말고, 신중하고 성실하게 제도를 운영해야 한다.
단순 지연 목적의 자리가 아닌, 진정성 있는 토론의 장을 열길 바란다. 국민은 필리버스터의 가치를 지키는 국회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