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광복절이 다가오면 ‘잘 알려진 영웅’의 이름이 매스컴을 도배한다. 김구, 안중근, 유관순 등 숭고한 희생을 남긴 이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지만, 그 뒤에서 묵묵히 저항의 자취를 남긴 인물들은 점차 잊히고 있다. 쿠키뉴스는 이번 광복 80년 기획을 통해 잊힌 이름들을 다시 소환하고, 우리의 ‘기억 범위’를 넓혀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

1936년 8월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뛴 24세 동양인 청년은 2시간29분19초, 당시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일본 최초의 마라톤 금메달을 받기 위해 시상대 맨 위에 선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묘목으로 일장기를 가렸다. 그러고선 눈물을 흘렸다. 일본 언론은 ‘영광의 눈물’이라 보도했지만, 사실과 거리가 멀었다. 청년은 일본 국기인 기미가요를 들으며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고, ‘울분의 눈물’을 쏟아냈다.
나라를 빼앗긴 청년 손기정은 그렇게 한국인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그는 대회 내내 일본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조선인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한글로 ‘손긔졍’이라 사인했고, 어디서나 ‘코리아 출신’이라 자신 있게 말했다. 베를린 체류 중 일장기가 달린 옷을 입은 건 대회 당일, 단 하루뿐이었다.
손기정 선생의 외손자인 이준승 손기정기념재단 사무총장은 지난달 쿠키뉴스와 만나 “손기정의 베를린 행적은 일본 입장에선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 세계 최고의 선수였기에 존중했지만, 그가 드러낸 반일 정서는 일본이 용납하기 어려웠다”며 “외국 언론과 인터뷰에서도 조선인임을 밝히는 손기정의 모습은 일본 입장에서 더욱 달갑지 않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사무총장은 “한번은 할아버지께 ‘만약 우승하지 못했으면 어쩔 뻔했냐’고 물었더니, ‘감옥에 갔겠지’라고 답하셨다”며 “젊은 나이에 그런 용기를 가지고 일본에 반하는 행동을 했다는 게 정말 존경스럽다”고 회상했다.
손기정을 탐탁지 않게 봤던 일본은 그를 떨어뜨리기 위해 대회 장소인 베를린에서 비상식적인 선발전을 개최한다. 1935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1위를 한 손기정은 불합리한 가운데서도 피나는 노력을 통해 추가 선발전을 겸한 ‘30km 기록회’를 선두로 통과했다. 조선인 출전을 막으려던 일본도 그의 강인한 정신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 사무총장은 “그때 할아버지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지 상상도 안 간다”며 “마라톤 본 경기를 앞두고 30km 시합을 치른 사례는 올림픽 역사상 전무후무하다. 손기정은 결국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했지만, 자신의 최고 기록은 아니었다. 조선인 손기정을 지켜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금메달을 딴 건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말했다.

손기정을 상징하는 대표 유물은 ‘대한민국 보물 904호’로 지정된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다. 기원전 6세기에 제작된 청동 투구는 올림픽의 꽃인 마라톤 종목 우승자에게 부상품으로 주어졌다. 이 전통은 제1회 1896년 아테네 올림픽부터 제11회 베를린 올림픽까지 이어진다. 손기정은 청동 투구를 받는 마지막 수혜자였다. 그러나 ‘아마추어리즘’을 중시하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규정과, 손기정을 꺼려한 일본올림픽위원회 결정으로 그는 현장에서 투구를 받지 못했다.
손기정은 이에 굴하지 않고, 청동 투구 반환을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그리고 1986년, 서독올림픽위원회로부터 마침내 투구를 돌려받았다. 그는 “이건 내 것이 아니라 민족의 것”이라며 이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오랜 세월 끝에 되찾은 민족 승리의 상징은 모두의 자산이 됐다.
이 사무총장은 “손기정은 1950년대까지 민족 영웅으로 평가받았다. 나라를 빼앗겼을 때, 민족이 힘들었던 시기에 손기정은 그들에게 큰 힘이 됐다”며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손기정에 대한 평가가 퇴색되고 있다. 손기정의 가치는 없어지고 그냥 베를린에서 잘 뛴 사람, 우승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너무 많은 부분을 놓치고 있다. 광복 80년을 맞아 할아버지가 남긴 뜻을 되새겼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강형구 손기정기념재단 초대 이사장은 “손기정은 나라를 잃었을 때, 국가의 존재에 대한 희망을 준 인물”이라면서 “현실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나라를 잃은 것보다는 훨씬 행복하다. 손기정이 흘린 눈물의 의미를 다시 봐야 한다. 광복 80주년에도 손기정의 교훈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손기정 선생은 나라를 빼앗긴 시대에 온몸으로 저항했고, 금메달을 통해 조선인의 자긍심을 드높였다. 광복 80주년을 맞은 지금, ‘민족의 영웅’ 손기정 선생의 정신을 기억해야 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