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의 함성과 가슴시린 추억이 있는 곳…동대문운동장은 변신 중

스포츠의 함성과 가슴시린 추억이 있는 곳…동대문운동장은 변신 중

기사승인 2009-03-23 17:31:09

[쿠키 문화] 이곳은 반세기를 뛰어넘는 세월동안 대한민국 스포츠의 메카였다. 경평(京平)축구대회가 1930년 제2회를 시발로 6회(1935년)·7회(1946년) 이곳에서 개최됐고, 이후로도 수다한 경기가 열렸다.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던 1960∼70년대 이곳에서 축구대표팀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온 국민은 일손을 멈추고 라디오와 TV 앞에 모여들었다. 1970년 9월 포르투갈 벤피카 팀이 한국대표 1진 청룡 팀과 가진 경기에서 벤피카의 세계적 스타 에우세비오에게 한 골을 허용했지만. 이회택이 기어코 동점골을 뽑아내 1대1로 비기자 온 국민이 환호성을 쳤다.

서울운동장에선 축구뿐 아니라 육상, 심지어 국제타이틀 복싱경기도 열렸다. 겨울철엔 한쪽에 아이스링크를 설치해 스케이트장으로도 활용됐으니 말 그대로
대한민국 유일의 종합경기장이었던 셈.

이곳은 우리 근·현대사의 굴곡이 얼룩진 공간이기도 했다. 1925년 5월 일제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화하기 위해 조선 500년을 지켜온 성벽을 허물고 근대식 운동장(당시 명칭 경성운동장)을 지은 자리가 바로 조선시대 훈련도감(訓鍊都監) 분영인 하도감(下都鑑) 터였다. 그런가 하면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 장수 오장경(吳長慶)이 군사 5000명을 인솔해 진을 친 곳도 이곳이요, 1884년 갑신정변 때 고종이 파천했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1945년 12월31일 영하 20도를 밑도는 혹한과 폭설 속에서 김구와 임시정부가 이끄는 신탁통치 반대운동대회가 열렸는가 하면, 해방공간 이념 투쟁의 좌편향 쪽에 서 있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약칭 전평)의 궐기대회도 열렸다. 그뿐이었나. 북한의 대남 무력 책동이 있을 때마다 반공 궐기대회가 열렸고, 각종 기념행사도 열렸다.

아무튼 1984년 잠실종합경기장이 완공돼 동대문운동장으로 개명되기까지 이곳은 명실 공히 서울을 대표하는 운동장, 즉 서울운동장이었다.

그 옆 야구장은 또 어땠나. 역시 서울운동장야구장이라는 이름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야구 명소였다. 야구 시즌의 개막을 알리는 황금사자기대회를 비롯해 수다한 고교야구대회가 이어졌고, 1982년 3월27일 프로야구 개막전 MBC 청룡 대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가 열린 곳이기도 했다.

프로야구도 야구였지만 황금사자기 청룡기 봉황대기 대통령배 등 고교야구가 열리는 날이면 모교 응원하러 온 졸업생들로 스탠드가 메워졌다. 삼삼오오 몰려온 졸업생들은 교가와 응원가를 목이 터져라 불러제꼈다. 이기면 이긴 대로 지면 진 대로 스크럼을 짜고 운동장 밖으로 나와 인근 대폿집에서 축배를 들며 호연지기를 나누기도 했다.

지나칠 수 없는 에피소드 하나. 이번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일본 킬러로 ‘의사(義士)’ 작위(?)를 받은 봉중근은 1996∼97년 2년 연속 황금사자기 결승전에서 모교 신일고교를 우승으로 이끈 괴투수로 기억에 남아 있다.

잠실야구장의 완공에 따라 동대문야구장으로 개칭되자 그 역할도 고교야구 전국대회나 대학야구대회 등 아마추어 전용구장으로 축소되었다. 급기야 재작년 11월13일 ‘2007 서울시고교야구’ 가을철 리그 배명고 대 충암고의 결승전을 끝으로 문을 닫고 이웃 동대문운동장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서울시는 그 자리에 ‘동대문디자인플라자 & 파크’라는 긴 이름의 랜드마크를 세우기로 했다. 연간 200여만명의 외국 관광객이 찾는 대한민국 대표 패션 중심지이면서도 과밀·복잡·무질서의 오명을 쓰고 있는 동대문운동장 일대를 공원과 컨벤션, 뮤지엄이 공존하는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키겠다는 의욕에서 출발한 초대형 프로젝트다.

국내외 저명 건축가
8명을 대상으로 한 공모 결과 이라크 출신의 영국 여성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출품한 ‘환유의 풍경(Motonymic Landscape)’이 선정되었다.

주변의 사물을 참조하기 위해 특정의 사물을 간접적으로 묘사하는 수사학적 의미의 ‘환유’와 인간과 환경 사이의 관계를 물질적으로 재현한다는 의미의 ‘풍경’을 조합한 이 작품은 이름처럼 몽환적이면서도 세련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적어도 조감도 상으로는….

다행히 하디드는 조선시대의 성벽 이미지를 시발로 이 공간이 지니는 역사적, 문화적, 도시적, 사회적, 경제적 요소들을 환유적으로 통합하려 애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동대문운동장과 동대문야구장의 추억을 간직한 이들. 특히 운동장 맞은편 굿모닝시티 자리에 있던 재개봉관 계림극장에서 본 ‘다시 한번 그대 품에’ 여주인공 마리안느 페이스풀의 가죽 재킷 입은 뇌쇄적 모습을, 헬로아 피엠 자리에 있던 경기여객 터미널에서의 안타까운 별리(別離)를, 두타빌딩 자리에 있던 덕수상고 앞 정류장에서 천호동행 버스를 한없이 기다리던 추억을 간직한 이들에겐 ‘환유의 풍경’이 이루어진다 해도 한동안 낯설고 서운할 것이다. 그 시절 동대문운동장이. 국민일보 쿠키뉴스 윤재석(국민일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