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키 문화] 올림픽 중계방송에서 시나브로 사라진 것들이 있다. 메달 획득 선수들의 프로필 화면에서 빠지지 않았던 배경음악 ‘이기자 대한건아’와 결승진출을 알리던 ‘은메달 확보’라는 자막, 금메달 환호의 순간에 빠지지 않던 고향집 이원 생중계 등이다. 올드팬의 향수를 불러일으킬만한 장면들이지만 시류의 변화와 함께 더 이상은 찾아보기 힘든 추억의 장면이 됐다.
◇‘우리들은 대한 건아 늠름하고~’
스포츠를 사랑하는 올드팬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추억의 응원가 ‘이기자 대한건아’의 행방이 묘연하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굵직한 세계대회에서 메달을 차지하면 선수의 이름, 나이, 신장, 체중, 출신학교, 입상경력과 함께 어색한 증명사진이 나오는 프로필 화면의 배경 음악으로 빠지지 않았던 노래다.
‘우~리들은 대한건아 늠름하고 용감하다’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육군 군악대장 출신의 고 김희조 작곡가가 모윤기 작사가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대한체육회의 통화연결음으로 사용됐지만 2009년 무렵엔 자취를 감췄다.
올림픽 중계방송에선 1996애틀랜타 대회 무렵부터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방송 제작 관계자들도 언제부터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이 음악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KBS 스포츠중계부 손영채 팀장은 “지금이라도 제작 PD가 쓰겠다고 하면 쓰는 것이지만 최근 젊은 PD들이 제작일선에서 일하다보니 세태에 맞지 않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기자 이기자 이겨야 한다~’, ‘조국의 영광안고 온세계에 내닫는다’, ‘빛내자 빛을 내자 배달의 형제들’ 등 승리 지상주의, 스포츠 국가주의가 짙게 채색된 가사와 군가풍의 멜로디가 더 이상 시대상황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판단이다.
◇‘은메달 확보’ 대신 ‘결승 진출’
준결승에서 힘겨운 대결을 승리로 이끈 뒤에 은빛 메달 컴퓨터 그래픽과 함께 대문짝만하게 화면을 채웠던 ‘은메달 확보’라는 자막도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 자리엔 ‘결승전 진출’이라는 자막이 대신한다. 중계 제작진들은 이 역시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결과라고 판단한다.
손 팀장은 “국민 소득과 문화 수준이 높아지면서 메달 중심 또는 메달 색깔 중심의 사고가 많이 퇴색했다”며 “메달을 따느냐 또는 무슨 색 메달을 따느냐에 집중하기보다는 선수의 성취 또는 준비 과정에 더 비중을 두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과거 국가별 성적에 중점을 두고 금메달만을 지나치게 부각시켰다면 이제는 메달을 따지 못해도 올림픽 무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또는 매 경기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더욱 아름답게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방송 중계도 시청자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해가고 있다는 게 방송3사 제작진의 공통된 견해다.
◇‘선수 고향 집을 연결하겠습니다’
결승전 승리의 포효와 프로필 화면이 지난 다음 어김없이 연결되던 고향집 인터뷰도 이제는 찾아보기 어렵다. 대회 전 우승이 유력시되는 선수 집에 중계차를 보내 고향집 표정을 스케치하고 부모님을 인터뷰하던 게 공식처럼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덩실덩실 춤을 추는 친지들과 고생했던 자식 생각과 힘들게 뒷바라지 했던 추억이 얽히며 눈물을 쏟아내던 선수의 어머님들. 간혹 아침 프로그램이나 브리지 프로그램 등 별도로 제작되는 프로그램에서 가족의 모습을 다루는 장면은 이번 대회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그러나 이제 이런 장면들을 경기 중계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올림픽 메달 획득이 가문의 영광을 넘어서 국가의 영웅으로 인식되던 과거와는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방증이다. 한 방송사 관계자는 “올림픽 메달을 획득하면 각종 혜택과 사회적 환대로 팔자를 고치던 시절은 지나갔다”며 “올림픽 메달에 국가의 사활이 걸린 듯 바라보던 시선은 많이 줄어들고 이제는 하나의 스포츠 이벤트로 접근하는 시각이 더 많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은메달을 따고도 대역죄를 지은 듯 눈물짓는 선수와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고 질책에 가까운 안타까움을 토로하던 스포츠 보도도 이젠 찾아보기 힘든 장면이 됐다. 올림픽 메달에 국가의 명운을 걸었던 것처럼 호들갑을 떨던 스포츠 국가주의가 많이 퇴색됐기 때문이다.
◇사라지지 않은, 않을 것들
하지만 올림픽은 아직도 스포츠팬이 아닌 일반 국민들도 ‘애국심’으로 지켜보는 살벌한 국가 대항전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멈추지 않은 1초’ 경기를 맡았던 심판의 페이스북이 수난을 당하고, 한국팀에만 유독 오심논란이 집중된다면서 안팎에서 원인을 찾는 언론보도도 여전하다.
올림픽이 ‘엘리트 스포츠’의 총아로 여겨지는 한국 스포츠계의 풍토가 바뀌지 않는 한 학생선수들이 학업을 뒷전으로 밀어놓고 훈련에만 목을 매는 비극도 쉽사리 막을 내리지 않을 듯하다. 직업 경찰이 동호회에서 갈고 닦은 사격술로 올림픽 무대에서 은메달을 따내는 어느 나라의 ‘올림픽 정신’이 아직은 부러운 시점이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선정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