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 네가 뭔데… 도심 고물상 가보니…

불황, 네가 뭔데… 도심 고물상 가보니…

기사승인 2012-07-06 22:04:01

[쿠키 경제] 비가 흩뿌리던 지난 4일 오후 1시 지하철 1호선 신길역 앞. 폐지를 수북하게 실은 수레를 끌고 가는 정길남(84) 할머니의 뒷모습이 무척 힘겨워보였다. 할머니는 대로를 벗어나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더니 Y고물상에 수레를 세웠다. 오늘만 벌써 세 번째 발걸음이다.

고물상 안에는 이미 폐지를 수거해온 노인 5명이 줄 서서 수거비를 받고 있었다. 손에 쥔 돈은 1000원에서 1만원 사이. 늙은 몸으로 여기저기서 폐지를 모아 가까스로 끌고 온 고생에 비하면 너무 야박하다 싶었다. ㎏당 90원. 정 할머니는 힘이 부쳐 수레를 이용해도 폐지를 한 번에 10~15㎏밖에 옮기지 못한다. 한 차례 싣고 와 1000원에서 1500원을 버는 것이다.

정 할머니는 “전에는 하루에 보통 2~3번이면 충분했는데 요새는 5~6번 많게는 10번을 왔다 갔다 해야 겨우 밥이라도 먹을 수 있다”며 서둘러 다시 폐지를 수거하러 떠났다.

Y고물상 사장 김태중(39)씨는 “폐지 단가가 지난해에 비해 절반 정도 떨어져 어쩔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Y고물상은 폐지를 ㎏당 90원에 사서 압축업체에 100원에 넘긴다. 폐지 매입가격은 올 초까지 150원선을 오르내렸다. 신문지의 경우 지난해 10월 초 ㎏당 200원 이상이었지만 지금은 120원까지 떨어졌다.

폐지 100㎏을 모아와도 버는 돈은 겨우 9000원 안팎인 셈이다. 폐지를 수거해오는 노인들도 크게 줄었다. 김씨는 “지난해 이맘때는 하루 150~200명 정도였지만 요즘은 70~80명밖에 안 된다”고 말했다.

김씨는 요즘 상황을 ‘바닥이 말랐다’고 표현했다. 철거를 비롯한 건설경기가 줄어드니 건축 폐기물로 발생하는 고철도 크게 감소했다. 지난해 Y고물상에는 하루 평균 5t트럭 4~5대 분량의 고철이 들어왔지만 요새는 2대 분량도 안 된다. 고철값도 ㎏당 330원에서 200원 정도로 떨어졌다.

주변 고물상과의 경쟁도 심해지고, 고물 좀도둑까지 기승을 부려 골치다. 김씨는 “영등포구에만 고물상이 60여곳이나 돼 경쟁이 치열하지만 우리끼리는 다투지 말자고 서로 격려하고 있다”고 했다.

서울 방배동 H자원 사장 김모(40)씨도 “작년 10월에 비해 고철 물량이 3분의 1가량 줄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김씨는 “외환위기 때는 오히려 부도나는 기업체들 때문에 고물도 많았고, 수출도 잘됐다”며 “고물상엔 불황이 없다고 했지만 지금은 사채까지 끌어 쓰다 갚지 못해 목숨을 끊는 고물상 사장들도 있다”고 말했다.

경기도 남양주 수동면 S자원 정모(58) 사장은 올해 초부터 직원 없이 혼자 일한다. 정씨는 “한 명 있던 직원에게 도저히 인건비를 줄 수 없어 그만 나오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은 어둠이 깊어지면 새벽이 온다는 진리를 체득하고 있는 듯 희망찬 내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12년째 이 일을 하면서 불황은 감기처럼 주기적으로 왔다가 떠나간다는 걸 깨달았죠. 결국 고물은 다시 보물이 될 겁니다.”

Y고물상 사장 김씨는 다시 폐지를 모아온 할아버지들을 반갑게 맞았다. “폐지 수거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생계를 위해서라도 고물상을 잘 지켜야겠죠.” 그는 노인들에게 폐지 값을 많이 주지 못하는 걸 미안해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이사야 기자 [email protected]
김철오 기자